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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 기억하는 소설, '몰: mall: 沒' 중에서

 

우리는 정말로 수많은 사건과 사고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중 강렬한 일부만을 우리는 접하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마저도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는 강렬하게 마음 아픈 사건을 마주하더라도 삶의 흐름에 따라 지내다 보면, 또 나에게 크게 마음을 찌르는 연관성이 없다면 잊히기 마련이다. 아주 금세.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이런 저런 기준으로 구분하여 가르기 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사건과 사고라는 게 항상 누군가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도 더 큰 슬픔과 찢어지는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이고.. 어쩌나.. 불쌍해서 어째..' 하는 생각과 함께 맞이하는 새로운 이벤트 뒤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사건의 크기, 피해자나 희생자의 수, 발생 원인을 따져가며 가르고 모으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싶다. 뉴스에서 얼마간 보도를 하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느냐, 얼마나 사건이 파헤쳐지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억하는 소설'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여러 사건과 사고들, 그리고 아마 '잊게 될'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이야기를 여덟 편 모아둔 책이다.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바로 '아.. 이 사건이 있었지' 하며 특정 사건과 사고가 머리를 가득 채우는 글도 있었고, 다 읽고난 뒤에야 어렴풋이 사건과 사고를 떠올리게 된 글도 있었다. 사건이 바로 떠오르던, 뒤늦게 희미하게 떠오르던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이 참 불편했다. 불편하면서도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책, 우리가 느껴야 하는 불편함을 이끌어주는 책, 불편함을 통해 세상에 대한 태도를 다잡게 하는 책. 그런 책이었다.

 

아저씨들이 가장 분노했던 건, 도망치기 직전 회장이 내렸다는 기다리라는 지시였다. 그들은 화를 냈지만, 내겐 그조차 낯설었다. 어쨌든 부자들이 사는 동네였으며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으니까. (중략) 무너진 백화점은 내게 세계 반대편에서 일어난 비극과 다름없었다. 

며칠이 지나자 아저씨들도 변했다. 무너진 백화점보다 관련된 중견 건설사와 하도급 업체들이 연쇄 도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더 걱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들부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질 터였다.

무너진 백화점의 잔해를 모아놓은 쓰레기 산, 그 곳을 정리하며 실종자들의 유해를 찾아내고, 잔해를 정리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였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던 그 붕괴사고에 함께 분노하던 그들은 현실의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 먼 반대편 세상에서 일어난 것 같은 그 사건이 내게까지 영향을 주게 될 수 있다는 그 두려움과 답답함.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억 방법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나와는 관련 없는 우리나라의 누군가가 당한 '큰 사건'이 아니라, 내 주변의 '큰 사건'으로. 

 

그녀의 말은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고, 그렇게 번역되어 들렸다. 

(중략)


하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학교를 빠져나간 학생들이 어디로 갈지, 아니 갈 곳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한 여학생이 취업 실습을 나갔다. 그리고 어느날 저녁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건다. 실습 나간 아이들이 늘 전해오는 힘들다는 투정이겠거니 하며 '버텨보기'를 권한다. 이러한 것도 버티지 못하면 앞으로 헤쳐나갈 일에 방해만 될 뿐이라며. 그 여학생은 얼마 뒤, 사망했다. 이를 책임져줄 수 없는 '기간제 교사'인 담임교사가 경력이 20년도 넘은 '정교사'에게 함께 도와줄 것을 요구하고 난 뒤에 들었던 말이다. 

 

알아, 다 아는데,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할게요. 성금 또 내야 되면 낼게. 열 번 스무 번 낼게. 근데, 그 이상은 자신 없어. 어설프게 나섰다가 나중에 감당 못 하면, 그게 더 못 할 짓이야. 살아보니 내가 그건 알겠더라고요

그 교사가 비정하다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선뜻 나서서 비정함을 깨고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라면?' 과연 나라면 성금을 내는 것 이상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 주변의 선생님들은 성금을 내는 것 이상의 도움을 기꺼이 줄 수 있는 사람들일까? 

 

이 책은 이러한 고민을 던져줄 수 있는 정말 수많은 문장들이 담겨있다. 단 여덟 편의 단편 소설들이 엮여 있음에도, 그 안에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수 많은 사건과 사고와 문제, 갈등, 그리고 희생이 담겨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언제든 떠올려야 하는 그런 것들이다. '사람들은 간사한 동물이라 잊어버린다고. 봐라, 또 무너진다'는 대사는 꼭 우리에게 전해주는 이야기 같이 느껴진다. 

 

너무나 쉽게, 너무도 빨리 잊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들. '기억하는 소설'이다.

 

 

A Day - Piano Ver.

라디 · Song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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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our sadness meets 우리의 슬픔이 마주칠 때 (with Kang Asol)

Jeon Jin Hee · Song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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