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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 맛을 잘 모른다. 적당히 '시큼하다', '쌉싸름하다' 정도의 구분만 할 수 있지 맛의 깊이가 어쩌고 저쩌고는 잘 모르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매일 커피를 찾고 있는 것은 맛보다는 그에 따라오는 효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작년까지는 출근길 일찍 문을 여는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사오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그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 무언가 모를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아무런 부담이나 걱정 없이 가만히 있어도 되는, 온전히 편안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올해 초 학교를 옮겼다. 출근길 경로가 바뀌게 되니 아침에 커피 한 잔 사는 것이 참 어려워졌다. 이전 학교와는 달리 주변에 일찍 문을 여는 카페도 없고, 코로나 19 때문에 출근 시간마저 앞당겨졌다. 더 이상 매일 아침 커피를 주문하며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나?


아침 일찍 출근을 하면 나는 교실에 가방을 놓아두고는 바로 교사 연구실로 향한다. 올 한 해, 교사 연구실이 내 단골 카페다. 어떤 선생님이 기증한 캡슐 머신도 있고, 맛있다고 소문난 베트남 커피도 있다. 커피가 없으면 안 되는 나도 교사 연구실에 한 가지 기여를 한 것이 있다. 교육 박람회에서 경품으로 받은 원두 머신을 연구실에 기증한 것이다. 

 

카페에서 주문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대신에, 이제는 연구실에서 커피를 내리며 가만히 고요함을 즐긴다. 물론 아침 카페의 조용하면서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없지만, 화려하고 따스한 조명들은 없지만, 분위기 있는 편안한 배경 음악은 없지만 나름 만족스럽다. 그 여유는 오래가지 않는다. 곧이어 다른 선생님들이 출근을 하고, 하나 둘 아이들도 등교를 한다. 

 

뜨거운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들고, 마스크를 다시 고쳐쓰고는 교실로 향한다. 커피 마실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지만 그저 내 책상 위에 따뜻한 커피 한 잔 담겨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다.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여유를 즐기는, 커피 한 잔 책상 위에 올려놓아야 마음이 풀리는, 나는, 커피가 필요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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