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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이 되면 많은 교실에서는 감사한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전달하는 시간을 가진다. 예전에 함께 했던 학생들이 종종 찾아와 편지를 건네준다. 잊지 않고 찾아옴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퇴근을 하고 편지를 하나하나 열어서 읽어본다. 여러 내용들이 있지만 함께 모여서 썼나 싶을 정도로 대부분의 내용은 '작년에는 좋았는데 올해는 힘들어요'다. 그렇다. 나는 꿀교사다. 일종의 쉬어가는 코너인 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꼼꼼한 성격은 아니다. 학교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학생들과의 약속을 가끔 잊어버리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한다. 이런 성격은 교실에서 일종의 '틈'을 만들어낸다. 학생들은 그 틈새를 기가 막히게 찾아서 틈밖으로 나가려 한다. 편지의 내용에서 좋았다는 것도 내가 잘해줘서라기 보다는 아마 잦은 틈 속에서 편함을 찾았기 때문인것 같다. 나도 약간의 틈이 있는 학급살이 방식이 좋다. 물론 하나하나 면밀하게 챙겨주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검열이 심하거나 어른의 눈치를 과하게 보는 학생들이 시간이 지나며 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틀린 방식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모습이 맘에 들지는 않았다. 

 

 신규교사일때는 학급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잘 몰랐다. 편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원칙없는 자유는 방만이 아니던가? 수업과 쉬는 시간, 친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 등에 대한 고려가 없는 채로 학급 운영을 했고 우리 반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수업 중에 학생들은 모두 떠들었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무서움의 부재에서 이유를 찾았다. 내가 웃으며 학생들에게 잘해줬기 때문에 분위기가 망가졌다고 생각한 것. 가끔 다른 반 선생님이 우리 반에 전달할 내용이 있어 들어오시거나 전담시간에 다른 선생님이 수업을 하면 조용히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무섭게 하면 학생들도 바른 자세로 수업을 들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3월에 잡아두면 1년이 편하다', '교사가 쉽게 이를 보이면 안된다' 등 학교 안에서 돌고 있는 격언(?)들도 한 몫했다. 나는 무서운 교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다음 날 아침, 엄한 표정과 차가운 눈빛을 장착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여느 날처럼 학생들이 내 책상 앞으로 몰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목소리로 책상으로 돌려보냈다. 수업시간에는 '~을 하/안하면 ~게 될 것'의 형태를 한 위협문구를 마구 날렸다. 수업활동 중 내가 허용한 범위 밖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하는 학생들은 바로 제제의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이 떠들거나 장난을 치면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호통을 치며 혼을 냈다. 가끔은 수업 중 반 학생 전체를 상대로 분위기를 잡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과연 우리 반의 분위기는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었을까?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더 안좋아졌다. 나는 화에 잠식되어갔다. 학생들을 혼내는 동안 화에 대한 역치는 점점 낮아지고 있었고 작은 일에도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수업시간과 쉬는시간을 가리지 않고 칠판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을 혼내느라 수업의 흐름을 끊는 것은 예사였다. 끊어진 호흡의 수업 속에서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화를 내는 것은 감정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소모가 큰 일이었다. 하루종일 화를 내고 나면 피로함이 엄습했다. 혼나고 돌아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야기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너무 감정적이었다는 후회도 나를 힘들게 했다. 

 

 나만 힘들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교사는 학생의 거울이라 하지 않는가? 학생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내가 엄포를 놓을때 사용한 말투가 같은 반 친구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불편함이나 스트레스를 화를 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학생들이 늘었다. 당연히 갈등, 싸움도 늘어갔다. 무서운 교사가 되기로 한 후 학급의 모든 지표가 나빠지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내가 원했던 것은 단호한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단호하다는 것은 원칙을 만들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수업 시간에는 공부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생각해보자.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와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일상의 이야기를 하러 온다면 "지금은 수업 시간이야. 수업 시간에는 공부를 하는 시간이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어. 조금 있다가 쉬는시간에는 선생님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으니 그때 와서 이야기해줄래?"라하며 원칙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단호함과 무서움을 구별하지 못했다. 나의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고 학생들이 나를 무서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학생들을 혼내고 있었다. 

 

 점점 나빠지고 있는 교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무서운 교사이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맘이 좋지 않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방향을 바꾸는 것은 맞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인지 아니면 경험이 쌓인건지 한 해 두 해 지내며 단호한 모습을 조금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소리를 낮추고 훈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틈을 주면서도 선을 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지금 반의 분위기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흘러갈까? 아니다. 여전히 학생들은 모두 떠들고 틈새를 노리고 있다. 

 

  한때 답답함을 못이겨 책이나 연수에서 학급운영을 잘 하는 방법들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주변 선생님들께 조언을 구했던 적도 있다. 좋은 방법들이 있으면 바로 다음 날 학급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스위치를 누르거나 진통제를 먹는 것처럼 단순하고 즉각적인 효과가 나오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방법은 없었다. 마음 속에선 편함과 단호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하루에도 여러 번 계속되고 있다. 상투적인 답이지만 교사가 끊임없이 노력하며 학급의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것 같다. 이 부분은 교사를 하는 동안은 계속 중요한 문제이지 않을까.

 

 오늘도 소란스러운 반을 겨우 이끌고 수업을 마친 후 지친 채로 복도를 걸으며 '분위기가 너무 풀려있나' 되뇌다가도 복도에서 마주치면 돌아서거나 피하지 않고 "선생님!"하면서 신나게 손을 흔드는 학생들을 보면 팍팍한 학교 생활의 쉬어가는 코너하나 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합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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