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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책을 잔뜩 사놓는 습관이 있었다. 서점에 가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몇 권씩 집어왔다. 그러다 보니 읽지 않은 채로 새 책을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책을 둘 공간도 없고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꽂혀 있는 책부터 먼저 읽자는 생각에 서점에 안 가기 시작한 것이 2년 정도가 되었다(코로나도 한 몫했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한 기회로 서점에 들렀고 집에 꽂혀 있는 책들도 꽤 읽었기에 다시 몇 권을 사왔다. 책을 고를 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윤여정 배우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 영화 '노매드랜드'였다(책 제목은 노마드랜드인데 영화는 노매드랜드로 나왔다).

 

'이야기가 있는 소설책을 읽어본 게 언제더라?'

 

 재미있는 소설책이 안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영상 매체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내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해서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2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인문,사회,과학 등의 책만 줄창 읽어왔다. 소설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영화화 된 것이라면 또 작품상까지 받았다면 '몰입감 있는 이야기의 소설'이겠거니 하며 책을 집어들었다.

 

 내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몰입감있는 이야기였으나 논픽션이었다(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르포타주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은 미국의 '노마드'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노마드들은 캠핑카에서 생활하며 길 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책 속의 사람들은 제도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한 때 중산층에 속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등의 상황으로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재산은 증발해 버렸고 주거비용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P.107
RV 주차장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당연시해왔던 중산층의 안락함에서 까마득히 아래로 추락한 노동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이 사람들은 최근 몇 십년간 미국인들을 괴롭혀온 모든 경제적 재난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에게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P.126
한때는 정해진 대로 하면(학교에 가면, 직장을 얻으면, 그리고 열심히 일하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사회적 계약이 있었죠."그가 방문자들에게 말했다. "오늘날 그건 더 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모든 걸 제대로 해도 결국에는 파산하고, 혼자 남고, 홈리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임시로 필요한 일들을 통해 수입을 얻는다. 캠핑 관리자를 하거나 크리스마스 시즌의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물건 분류작업을 한다. 하지만 노동여건이 좋지 않다. 계약된 근무시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거나 업무 중 다치는 것에 대한 보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노마드들은 불평하지 않고(못하고) 묵묵히 일을 해 나간다.

 

 금전적, 제도적 어려움에 늘 맞닥뜨리지만 노마드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의지하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며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아낸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_『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고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을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다. 다만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나라도 부의 격차가 점점 커지고 사회 내 계층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IMF로 해고당해 가세가 기울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코로나19 거리두기 단계로 인해 매출이 떨어져 월세를 내지 못해 폐업을 하게 된다면, 군 복무중의 부상으로 본인이 쌓아왔던 커리어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이것은 개인의 능력 부족일까? 혹은 개인이 나태해서일까?

 

 한때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개인의 능력을 가지고 알아서 살길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개인의 능력을 열심히 발휘하는 것이 사회나 국가발전의 힘이겠다만 어디까지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P.401
평균 소득을 비교할 때,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위 5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의 81배를 벌고 있다. 소득 사다리에서 하위 50퍼센트에 속하는, 약 1억 1700만 명에 이르는 성인 미국인의 소득은 1970년대부터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이것은 임금 격차가 아니다. 차라리 하나의 단절이다. 그리고 점점 커지는 그 분열의 대가는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다_p.401

P.402
계급 분열의 심화는 사회이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 결과는 사실상의 신분제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낭비가 심한 시스템이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게 접근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 방대하게 비축되어 있는 재능과 지력을 그냥 내다버린다는 뜻이다.

P.402
그리고 상황은 지금 나쁜 것만큼이나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내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사회질서에는 어떤 더 심한 뒤틀림이, 혹은 돌연변이 같은 변화가 나타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에 의해 파괴될까? 시스템을 벗어날 길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아무래도 요즘 내가 고민하는 부분들을 중심으로 읽다보니 눈에 들어오는 문구가 편향적이었지만 책 속에는 다양한 생각거리, 즐거움이 들어있으니 한번 보면 좋을것 같다. 조만간 영화도 봐야겠다.

 

ⓒ 2021. 월셔. All rights reserved

 

영화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tfmRVC_GA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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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날 여느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