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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한라산에 다녀왔다. 정상의 절경도 잠시, 생각에 잠겨 터벅터벅 내려오던 기억이 있다. 시원했던 공기와는 달리 답답함과 막막함으로 기억된 산행.

 

몇 년간 인생을 게임 공략하듯이 살아왔다. 퀘스트를 하나씩 깨 나가는 것이다. 입시, 임용, 군대, 발령이 그렇게 지나왔다. 내가 딱히 방향을 잡지 않아도 이 시기에는 컨베이어벨트에 실려가듯이 혹은 주변 동기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움직였다. 발령을 받고 나서도 벌어지는 하루를 살아내기 바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이제는 다녀올 군대도 없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당장 먹고 살 걱정을 안해도 되고(딱 걱정을 안하는 정도지만), 학교 업무나 문화에도 적응을 한 시점. 이젠 등 떠미는 사람과 상황은 없지만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야 했고, 키를 잡아보지 않은 조타수의 느낌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동안 해온 것이 퀘스트를 깨온 것이다. 할 줄 아는 것이 뭐 있나? 다음 퀘스트 거리를 찾았다. 가고 싶은 방향 보다는 가야할 것 같은 방향으로 키를 돌렸다. 한 살이라도 어릴때 석사를 따둬야겠다는 맘에 연구하고 싶은 분야도 없이 대학원에 원서를 넣었다. 좋아보이는 모임과 연구회에 나갔다.

 

처음에는 싫지 않았다. 목표가 생긴 것에 대한 약간의 안도, 그리고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었기에 느낀 편안함. 하지만 이내 혼란스러워졌다. 스스로에게 납득할만한 이유가 없는 채 의무감을 원동력으로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하자니 불안했다. 조금씩 소진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작년, 나에게 멈춤의 사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현재 근무하는 학교는 작년에 개교를 했다. 우리 학교는 업무전담팀이 구성되어 있어 담임 선생님들에게는 행정업무를 부여하지 않고 업무전담팀이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작년 한 해(올해도, 내년도...) 나는 업무전담팀으로 일했다. 주말도 공휴일도 없이 일했다. 정시퇴근한 날이 손에 꼽을 정도로 바빴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유난히 그날 방이 깜깜해 보였는지 아니면 추워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문득 죽으면 '춘천에서 적당히 집을 구하고 가정을 꾸린 평판 괜찮은 교사' 한줄로밖에 요약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어가면서 궤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를 지워가면서 상황이나 주변에 나를 맞추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작년 기준)내년엔 일단 다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하면 좋을것 같은 일들을 그만뒀다. 대학원을 휴학했고 연구회 신청기간도 지나쳤다. 뜻이 있으면 같이 하자는 감사한 제안들도 거절했다(로또가 안되기에 적금은 못깼다 학교도 못때려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나는 뭘 하고싶은 걸까?',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 두 가지가 올해 (배고파, 졸려, 집가고싶어 제외)내 머릿속을 가장 많이 스쳐간 생각이다. 겨울철 소파에 누워있을때에도, 날이 풀려 매일 강변을 뛰면서도, 선생님들과의 약속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계속 되뇌었다.

 

그래서 올해 무얼 했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러닝크루에 들어갔다. 생각이 많아질때 강변을 뛰는 걸 좋아한다. 혼자서 뛰고 있는데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같이 뛰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러닝크루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정회원 자격을 얻어 가입했다. 그리고 올해 10km지만 처음으로 마라톤 완주도 했다.

 

2박 3일의 지리산 종주를 했다. 대학생때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더 미루기 싫었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서 시작해서 경남 산청의 대원사로 내려왔다. 깊은 산 속 고요함, 맑은 날에 바라본 풍경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5년만에 읽고 싶은 책 10권을 읽었다. 읽어야만 하는 책이 아닌 읽고 싶은 책이다. 그동안 책도 의무감에 읽고 있었다.

 

 

https://youtu.be/hfqrVx378ZM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다 보니 만들고 싶은 컨텐츠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 유튜브 영상도 만들었다. 10부작으로 생각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2개밖에 못만들었지만 좋아하는 영상 중 하나다. 카메라 속에 사람을 담는 과정에서 영상촬영에 대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잘 모르겠지만 2023년의 목표다.

 

카메라를 샀다. 스쳐가는 순간들 중 담아두고 싶은 때가 많았다. 더 잘 담고 싶었다.

 

 돌아보고 나니 놀기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멈춰있는 느낌이 들어 종종 불안하다. 하지만 내년도 올해처럼 지내면서 좋아하는 것,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들을 찾아가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돌고 돌아 내 일터에서도 교실 안에서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되겠지.

 

내년 2월, 나는 다시 한라산에 간다. 이번 산행은 어떻게 기억될까?

 

ⓒ 2022. 월셔.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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