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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터넷이나 TV에서 '할말하않'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것을 볼 수 있다. '할 말은 많으나 하지 않는다'의 줄임말이다. 주로 억울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때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분위기상 참고 넘어갈때 사용한다. 예능 프로 등에선 여럿이 모여 한 사람을 장난으로 몰아갈때 타겟이 된 사람이 '할말하않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받아치는 식의 가벼운 상황에서 쓰인다. 하지만 부당함을 겪은 상황에서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느니 일만 더 생기고 그냥 내가 참고 말지'하며 넘길때 사용되기도 한다. 

 

 2년 전 일이다. 2월에 처음으로 새 학년 선생님들과 만난 날이었다. 간단한 학년회의를 마치고 학년업무를 분담하는 시간이 왔다. 주로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조율을 해주시는데 그 해 학년부장 선생님은 선배교사에게는 어떤 부탁도 하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늘 본인보다 후배인 사람들에게만 일을 맡겼다. 

 

 학년 초에는 매일 오는 가정통신문을 배분하거나 복사용지를 가져오는 등의 일을 맡았다.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일이 늘어갔다. 택배로 온 전체 학년의 청소용품과 학습 준비물을 옮기기, 과학 수업 중 단원별로 필요한 실험도구 학년 단위로 준비하기, 기타 행사 및 학사일정에 필요한 잡무들이 모두 나에게 왔다. 학기 초라 바쁘셔서 그러겠거니 하고 일을 했다. 

 

 학기중 학년 회의를 한 날이었다. 회의는 학년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다른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더니 나랑 옆반 선생님께 연구실 청소를 부탁했다. 6명이 모두 쓰는 연구실인데 왜 청소는 2명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었으나 '할말하않'하고 청소를 했다. 부장님께서 알아서 앞으로 생길 학년 업무는 골고루 분배해주실거라 믿었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사정이 생겨 옆 반 선생님께서 잠시 학교를 안나오게 되셨다. 옆 반 선생님이 담당하고 있던 원어민 교사와의 수업 조율업무가 나에게 넘어왔다. 부장님께서는 다른 선생님들께서 원어민 교사와 이야기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시기 때문에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하고 있던 일 중 하나를 다른 선생님께 배분해 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씀드리려고 했지만 학년 구성원의 부재로 부장님께서도 정신이 없겠다는 생각에 '할말하않'하고 넘어갔다. 

 

 2학기가 되었다. 연구실 컴퓨터의 보안진단 관리와 옆 반에 오신 기간제 선생님을 챙겨 드리는 것을 추가로 담당하게 되었다. 1학기에만 하기로 했던 과학 준비물 업무도 계속 부탁한다는 쪽지를 받았다. 어느 순간 학년업무의 거의 모두를 내가 담당하고 있었다. 쉬는시간, 점심시간은 학년업무로 늘 바빴다. 부장님께 말씀드리려 했지만 이정도로 일을 하는것을 알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에 '할말하않'하였다. 

 

 시간이 흘러 졸업식이 3주 남은 시점이었다. 6학년에서 학년별로 졸업 축하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고 수업을 하던 중 나에게 졸업영상을 부탁한다는 쪽지가 왔다. 일을 계속 맡으면서도 부장님을 믿었지만 착각이었다. 난 그냥 만만한 사람이었다. 말씀을 드리기로 했다. 

 

학생들에게 "얘들아 너무 미안한데 선생님이 지금 수업을 하기 조금 어려운 상태니깐 교과서 보면서 5분만 시간을 줄래?"라고 양해를 구한 후 맘을 진정하고 바로 쪽지를 보냈다. 

 

'제가 영상을 만들겠습니다만 부장님께서 지금까지 저에게만 모든 학년업무를 시키신 것은 기분이 나쁘네요.'

 

 수업이 끝나고 바로 전화가 왔다. 

 

"일이 생기면 생각나는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선생님이 너무 잘해서 그랬어요."

"절대로 모든 일을 시키려는 건 아니었어요."

 

등의 변명이 이어졌고, 더 이야기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대충 응대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나서 그동안 너무 할말하않으로 일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라는 것을 칼로 재듯이 나눌 수도 없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양이나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웃으며 부탁을 하거나 개인적으로 쪽지를 보낸다. 특히 초등학교는 선후배 문화가 아직 강하게 남아있다. 학교상황을 잘 몰라 거절이 어려운 신규교사나 나이가 어린 저경력교사들이 주로 당하고 힘들어한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로 나는 필요한 상황에선 말을 한다. 무조건 일을 안맡으려 하는 것이 아니다. 출장이나 연수 등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을때, 혹은 부당한 업무부탁의 경우 도와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린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주말이나 밤에 오던 문의나 전화가 줄었다. 사적인 부탁을 하는 경우도 사라졌다. 가장 나아진것은 감정의 개입없이 깔끔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은 일대로 하는데 부당한 감정까지 마음으로 삭이고 있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동기들이나 또래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비슷한 상황에 힘들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착한 사람들은 '할말하않'의 굴레에서 끙끙거리고 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체념이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할 말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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